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그 특사 (문단 편집) ===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통치에 대한 비판 === [[파일:A plea For Korea.jpg]] 1907년 8월 22일 자 미국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지에 실린 연설문이다. 이 잡지는 이위종을 '왕자 이위종(Prince Ye We Chong)'으로 소개했다. 연설문 제목은 '한국을 위한 호소문'(A Plea for Korea)이다. >일본 정치가들은 늘 일본이 일본만이 아니라 모든 문명과 모든 국가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하지만 놀랍고 슬프게도 일본은 '정의롭고 평등한 기회'를 보장한다는 구호와 달리 추하고 불의하며 비인도적이고 이기적인 야만스러운 행동을 보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The Japanese publicists proclaimed, time alter time, that Japan was not fighting for herself alone, but also for all civilization and for the commercial benefit of all nations. (중략) To our amazement, and great resentment, Japan had been and is playing the ugly, unjust, inhuman, selfish and brutal role instead of a fair and 'equal opportunities for all' role. 다음은 위 인용문 가운데 '(중략)'으로 가려진 부분이다. >'''잔인한 지난 정권의 학정과 부패'''에 질려 있던 우리 한국인은 일본인을 희망과 공감으로 맞이했다. 우리는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만민에게 정의를 구현하며 정부에 솔직한 충고를 해주리라고 믿었다. 우리는 일본이 그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하리라고 믿었다. >We, the people of Korea, who had been tired of the '''corruption, exaction and cruel administration of the old Government''' received the Japanese with sympathy and hope. We believed, at that time, that Japan, while dealing possibly stern measures against the corrupt officials, would give justice to the common people and would give honest advice in the administrative work. We believed that Japan would seize the occasion and lead the Koreans in their efforts to bring about the necessary reforms. 7월 8일 연설에서 이위종은 일본 제국뿐 아니라 고종의 통치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한국 국민과 정부는 한국의 독립유지와 영토보존을 위해서라는 일본의 정중한 약속을 믿고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이 조약의 결과로서 한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였다. '''또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와 가혹한 행정에 허덕여왔던 한국 국민과 정부'''는 애원과 희망으로 일본인들을 환영하였다. 그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이 부패한 정부 관리들을 엄격히 처벌해 주고, 일반 백성에게는 정의감을 북돋워 주고, 정부 당국의 정치․행정에 대해 진실한 조언자가 되고, 한국민들의 개혁운동을 잘 인도해 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일본인들은 거듭하여 그들의 한국 진출은 그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문명국들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문호개방과 모든 백성을 위한 기회균등의 보존을 공고히 하기위함이라고 극구 강조하였다 >---- >''오영섭. (2007).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9, 15-16'' >이위종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근대교육을 받은 경력이 있으며, 근대사상의 조류들이 유행하는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철저한 근왕주의자인 이범진보다 정치사상 면에서 진보된 모습을 보였다. 그는 1896년 7월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부친의 영향으로 나이 어린 야무진 군권주의자의 면모를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07년 7월 헤이그 국제협회에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을 때에 대한제국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 가혹한 행정 등으로 인해 인민이 고생하고 있음을 인정했을 뿐더러 그러한 정치를 ‘구체제하 정부의 잔혹한 정치’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는 이위종이 고종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고종의 통치에 대해서 깊은 불만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1919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국민들만이 미국인들처럼 사리사욕을 쫓지 않고 박해받는 자들의 자유를 위해 진정으로 투쟁할 수 있다”며 미국의 자본주의체제를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적극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이위종의 정치사상이 군권주의에서 민주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전환해 갔음을 나타내 준다고 생각한다 >---- >''오영섭. (2007).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9, 43-4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